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탈린그라드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VA9QBHDtfCQ)]}}}|| ||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후의 전황 || '''이 전투로 독일은 동부전선 전체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은 제6군이 삭제되며 1942년 이래 주전선이 된 남부집단군의 차후 공세 진행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포위-섬멸당한 최초의 전투로 일방적인 독일의 공세로 진행되던 독소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이 시점에서 소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독일군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 전투에서 항복한 독일 6군은 독일군 정예 병력으로 동부전선에서 큰 활약을 하였던 부대였기 때문에 이후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그 공백의 크기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이로 인해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공세 역량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부전선에서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에 붙잡혀 있었고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극심한 손실을 입고 발터 모델의 지휘하 르제프 전역에서 방어전에 일관하고 있었다. 북부와 중부집단군이 공세능력을 상실한 동안 독일의 공세는 남부집단군이 주축이 되었고 그 선봉에는 6군이 있었다. 독일 제 6군은 그냥 단일 군사령부가 아니었다. 블라우 작전이 진행되면서 육군사령부 예비 군단을 증원받고, 4기갑군의 기동전력까지 건내받은 거대 야전군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섬멸되며 독일은 전 전선에 걸쳐 공세 능력을 잃어버렸고 이후 물 오른 소련군의 역습을 돌려 막기 급급해졌다. 6군만의 피해가 아니었다. 우라누스 작전 직후 독일 4기갑군은 껍데기만 남아버렸고, 이탈리아 및 루마니아 군에서 십수만의 피해가 발생했다. B집단군 예하의 4개 군급 부대가 붕괴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기갑 장비의 손실도 막대해 최소 1,000대 이상의 전차를 손실해버렸고 또한 수송기 전력도 480대 이상이 파괴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어버렸다. 이는 독일의 생산능력으로는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한 피해였다. 우라누스 작전이 시작된 시점에 독일군의 운명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포위 전에도 제6군은 병사들이 '음식이 부족하다'는 수기를 남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6군은 말에게 먹일 먹이가 없어 겨울이 오자 제6군의 기동력을 책임지고 있던 말들을 후방으로 보내야만 했다. 여기에 포위망이 완성되니 더욱 상황은 심각해졌다. 겨울폭풍 작전 당시 1달 정도 포위되어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하자 독일 6군은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식량 및 연료가 부족해 제대로 전투 행동을 취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6군이 공세역량이 있다고 판단한 사단은 29차량화보병사단 하나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탈출은 결국 제6군 전체의 전투서열 이 붕괴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점도 있었는데, 6군이 소련의 군대를 스탈린그라드에 묶어두고 있을 동안 [[캅카스]]에 진출했던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간발의 차이로 포위망을 탈출해 버렸다. 만약 6군이 일찍 항복했다든지 아니면 일찍 탈출해 버렸으면 A집단군은 소련군의 포위망에 걸려 6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더 칭송해야 될 판국이었다. 한편 B집단군이 거의 전멸해 버린 독일군은 남부 [[러시아]] 전선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됐다가 발터 모델과 만슈타인의 신들린 기동방어 전술로 르제프 전역에서의 소련군의 공세(화성작전)와 뒤이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하르코프에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생명 연장의 꿈을 꾸게 되지만, 1943년 히틀러가 공세능력을 상실했지만 방어능력은 건재했던 남부집단군을 [[쿠르스크 전투]]에서 날려먹으며 굳건한듯 했던 독일의 동부전선이 붕괴되어 독소전쟁에서 패배한다. 또한 소련군 저격 전설의 시작도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소련군 전설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 해군 하사와 독일 육군 저격학교 교장 에르빈 쾨니히 육군 산악 소령의 초인적인 저격수 대결을 묘사했다. 러시아에선 바실리의 회고록에서 나온 내용이니 진짜라고 하지만 서방 측은 물론 심지어 독일에서도 바실리가 거물급 저격수들을 해치운 것은 사실이나 에르빈 쾨니히나 하인츠란 이름의 저격학교 교장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 에르빈 쾨니히나 하인츠 토르발트 SS 대령이라는 이름은 전투가 끝난 후 독일 저격수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름들이고, 당시 격전에서 독일군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이체프가 사살한 독일 측의 특급저격수가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연합군 반격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전환되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서구 전사학자들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시작으로 나치 독일의 패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를 시점으로 나치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소련의 자체적 역량에 밀리기 시작한데다 소련 측이 무기대여법 효과까지 받는 것으로 전력에서 뒤쳐지게 되면서 점점 동부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이후 서부전선에서도 결국 아르덴 대공세의 실패로 인해 소련군에게 베를린까지 점령당하는 결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독일군은 기동전과 포위섬멸을 반복하면서 소련군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교전비 1:20 수준의 참담한(나치에겐 찬란한) 결과의 원인이 바로 이것. 통상적인 전투는 양군이 서로 피터지게 싸우다가 진 쪽은 물러나며 병력의 20-50% 손실을 입고, 이긴 쪽도 그와 비슷하거나 더 적은 피해를 입는 병력 교환, 즉 소모전의 형태를 보인다. 1차대전기의 참호전이 그 전형적인 예시. 그러나 독일은 빠른 기동을 통해 소련군을 포위하고, 소련군은 스탈린의 후퇴 금지령 탓에 망기적거리다 포위망에 갇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부대 자체가 삭제되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불과 몇 달만에 모스크바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기습의 효과도 있었지만 기동전과 포위섬멸을 채택한 전과였다. 하지만 모스크바 전투부터 독일군은 포위기동 대신 단단하게 준비된 방어선에 들이박는 소모전을 강요당했고, 여기서도 독일군이 더 잘 싸웠지만 어쨌든 양측이 멱살잡고 싸우며 독일 측의 손실도 이전에 비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모전의 절정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독소전 초기 소련군 수백만을 잡을때 입은 피해보다 스탈린그라드의 빌딩 하나 점령하는 데 입은 피해가 크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처절한 격전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 하나에 군 전체가 묶여버리며 자신들의 장기인 기동전을 활용하지도 못했다. 역으로 소련군이 6군의 포위섬멸을 시도해 궁지에 몰아넣고 결국 승리하며, 미숙하게나마 기동전과 제병합동 부문에서 조금씩 독일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청색 작전 이후로 더이상 이전과 같은 돌파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성장해가는 소련군과 밀고밀리는 전선 싸움을 반복하게 된다. 소련은 전선군이 통째로 삭제되는 참사에서도 꾸역꾸역 새로운 부대를 편성했지만, 독일은 여기서 한번 삭제된 피해를 종전 때까지 회복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